현대 사회에서는 과학과 기술이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관습이나 오래된 신념이 여전히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특정 숫자나 단어가 지닌 소리, 의미에 따라 기피 대상이 되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일본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숫자 ‘4’에 대한 불안과 금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 숫자가 단순히 기피의 대상이 된 데에는 언어적 유사성, 종교적 배경, 그리고 사회적 전승이 깊게 얽혀 있으며, 지금도 일본인들의 일상과 의식 속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언어와 소리의 우연이 만든 두려움의 시작
일본어에서 숫자 ‘4’는 ‘시(し)’라고 발음합니다. 문제는 이 ‘시(し)’라는 소리가 일본어로 ‘죽음(死, し)’과 정확히 같다는 점입니다. 발음이 동일하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이 숫자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게 되었고, 결국 ‘4’는 일종의 금기 숫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유사성은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내려, 공식적인 문서, 호텔 객실 번호, 병실 배치 등에서도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는 4호실을 아예 생략하는 경우도 있고, 아파트나 호텔에서는 3층 다음이 곧바로 5층으로 이어지는 곳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장난이나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금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문화적 맥락에서 본 '죽음'과의 거리 두기
일본은 불교와 신토(神道)라는 두 가지 주요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이 두 종교 모두 죽음을 불길하거나 정화가 필요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합니다. 신토에서는 죽은 자의 존재를 ‘부정(穢れ, 케가레)’한 것으로 간주하며, 죽음을 다룬 후에는 반드시 정화 의식을 거칩니다. 불교에서도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과 윤회의 개념이 존재하지만, 현세에서의 죽음은 여전히 고통과 이별의 상징입니다.
이렇듯 일본 사회 전반에 ‘죽음은 피해야 할 것’이라는 정서가 강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죽음’을 연상시키는 단어조차 일상에서 멀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4’라는 숫자입니다.
실제 사례로 보는 숫자 4의 회피 현상
일본 여행 중 호텔에 머문 적이 있다면 객실 번호에서 ‘4’를 보기 힘들었다는 기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병원, 요양 시설, 장례식장 등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숫자 ‘4’가 배제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병원들 가운데 일부는 병실 번호에서 4호실은 물론, 14, 24, 34 등도 함께 생략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일본의 주요 전자제품 회사들 중 일부는 제품 모델명이나 시리즈 번호에서 '4'를 피하거나, 의도적으로 생략하여 소비자들의 불안감을 줄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신제품 발표일을 4일로 잡지 않는 등 날짜조차 피하는 사례도 존재합니다.
숫자에 대한 민감함은 일본만의 현상일까?
숫자와 관련된 미신이나 금기는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각 나라별로 숫자에 부여된 상징성은 매우 다양하며, 어떤 숫자는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반면, 또 어떤 숫자는 불행을 불러온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도 숫자 ‘4’는 피하는 숫자 중 하나입니다. 중국어로도 ‘4(四, sì)’는 ‘죽다(死, sǐ)’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엘리베이터에서 4층을 ‘3A’로 표기하거나 병원에서 관련 숫자를 생략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서양 문화권에서는 ‘13’이라는 숫자가 불운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종교적 이유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의 마지막 만찬에 참석한 13번째 인물이 유다였다는 점, 그리고 중세 유럽에서 13일 금요일이 불길한 날로 여겨졌다는 전승 등이 그 배경입니다. 그리하여 서양의 호텔이나 항공기 좌석에서도 13번을 생략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특정 숫자에 대한 두려움은 문화적, 언어적 요소가 결합되어 생겨나는 전 세계적 현상입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한 금기의 힘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이 같은 미신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이를 ‘문화적 정체성의 일환’으로 설명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신념 체계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로 논파된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이러한 믿음들이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이 같은 숫자 기피 현상은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번호나 차량 번호를 고를 때도 ‘4’가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는 미신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감각, 혹은 예의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숫자 4’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언어 유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음을 둘러싼 민족적 감수성과 문화적 맥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타국의 문화를 이해할 때, 우리는 표면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그 내면에 깃든 정신과 세계관까지도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숫자 하나에도 역사가 있고, 감정이 있으며, 그 사회의 가치관이 스며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고도 의미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존중할 때, 우리는 진짜로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다음 미신 여행도 기대해 주세요. 행운은 숫자보다도 마음속 태도에서 시작된답니다.”